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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M은 왜 죽지 않고 시장을 떠도는가 (4)


이번에는 ‘고객’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소통’의 역할, 고객과의 올바른 소통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마지막으

로 기업은 ‘고객 관계 관리’를 통해 어떤 목표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객은 도대체 누구인가?

언제부터인가 기업들은 ‘소비자(Consumer)’ 또는 ‘구매자(Buyer)’라는 표현을 쓰는 대신 ‘고객(顧客, Customer)' 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지만, 막상 정확한 뜻을 말해보라고 하면 대답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한자어로 표현된 고객(顧客)은 顧 : 돌아볼 ‘고’ 客 : 손님 ‘객’ 한번 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 찾아오는” 손님을 뜻합니다. 영어로 표현하는 Customer는 반복되는 행위, 맞춰진, 익숙한 습관 등을 의미하는 ‘Custom’에서 온 단어로 ‘익숙해진 사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상품-서비스를 ‘구매’한 사람이 아니라 지속-반복성을 지닌 ‘관계’와 ‘소통’의 대상이라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자주 보면 호감이 생긴다

1968년, 사회 심리학자 Robert Zajonc (1923~2008)는 사람들이 대상물에 단순히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대상에 대한 긍정적 태도가 형성될 수 있다는 반복 노출-호감도 형성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그 이론의 핵심은 인간의 뇌는 익숙한 정보는 쉽게 받아들이지만 낯선 정보는 새롭게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므로 가급적이면 낯선 대상은 기피하고 익숙한 대상을 선호하는 성향이 DNA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 현상을 ‘단순 노출 효과 (Mere Exposure Effect)’라고 하는데, 최소 15회에서 20회 이상 노출이 누적될 경우에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수많은 광고와 마케팅 활동에 의한 소통은 이러한 사람의 심리 효과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반복 노출에 의한 인지만으로도 ‘호감’이 형성될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특성을 잘 살리게 되면, 고객에 대한 소통은 ‘익숙함’으로 이어질 수 있고, 소통의 지속을 통해 ‘친숙함’을 바탕으로 하는 긍정적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게 됩니다.

# 불쾌감을 유발하는 소통 보다는 올바른 관계 형성을 위한 소통을.

‘고객’이라는 단어가 ‘익숙함’과 ‘반복’을 의미하며 ‘관계성’과 ‘소통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은 ‘고객 관계 관리’를 생각하고 있는 기업들에게 고객과의 ‘접점’과 ‘소통’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소통의 지속이 익숙함-친숙함-긍정적 관계 형성으로 이어지도록 하려면 고객의 체험이 불쾌함이나 부담을 유발하지 않게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구매 전환이나 추가 구매를 목적으로 한 소통을 남발하게 되면 고객은 소통 자체를 지속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긍정적인 관계 형성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지나치게 소통을 몰아붙일 경우엔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올바른 관계 형성을 위한 소통이 가능하려면 소통의 목적과 의도를 투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여기서의 ‘올바른’이란 도덕적인 측면에서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합리성’과 ‘합목적성’에 부합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기업이 사실상 바라는 것은 ‘더 많은 고객들에게 더 많이 팔고 싶다’ 그리고 ‘더 많은 이익을 남기고 싶다’이고, 반대로 대부분의 고객들이 바라는 것은 ‘돈을 들이지 않고 갖고 싶다’ 그리고 ‘공짜로 더 많은 혜택을 받고 싶다’입니다. 이렇게 의도와 목적이 내재된 상태에서의 소통과 관계 형성은 합리성과 합목적성 측면에서 올바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기업과 고객은 겉으로는 관계를 형성한 듯 연출하고 있지만 서로를 전혀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각자의 입장에서 승리하기 위한 일종의 Game이며, 모든 소통은 이기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기업은 고객을 포획해서 가두어 두려 하고, 고객은 상품과 서비스를 훔쳐 달아나고 싶어 합니다.



만약 서로의 목적을 위해 각자의 매력이나 능력을 활용해서 상대를 간 보거나 주도권을 다투는 불가피한 신경전을 벌이는 남녀 관계를 합리-합목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어떨까요?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경제력과 능력을 보여주며 결혼 상대로 어필하고는 있지만 여성을 잠자리 상대로만 생각하는 남성과, 예쁜 외모와 청순함으로 매력을 발산하지만 사실은 명품 선물을 얻는데만 관심을 가진 여성과의 관계는 기업과 고객의 보이지 않는 쟁탈전과 매우 유사합니다.

세상이 다 그런 거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도덕적 관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사실 Give and Take 관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의도와 목적을 숨기는 표리부동한 관계에서의 관계 관리란 결국 상대가 떨어져 나가기 전까지 최대한 단물을 빨아먹는 쪽이 이득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합리성과 합목적성에 부합되는 소통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단골 고객으로 만들어 오랫동안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라는 의도를 표방하는 기업과 ‘나는 내가 거래하고 기여하는 만큼 대접받고 싶다’는 고객이 만나게 되면 ‘올바른’소통과 관계 형성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기업은 단골 고객을 만들고자 하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 설명하고 단골 고객에 대한 정의와 기준을 제시하면서 관련된 정보와 혜택을 제공하고 고객은 개별적인 식별을 통해 관리받으며, 구매 실적이나 참여 실적에 근거한 합리적인 처우를 받을 수 있고 소속감 / 안정감 / 영향력 등 사회-심리적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올바른’ 거래가 가능하려면 기업과 고객이 서로의 목적과 의도를 확인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경로와 방법이 필요합니다.


# 올바른 소통 경로와 방법을 만들어가는 '고객 관계 관리'

‘고객 관계 관리’, CRM의 본질적인 역할은 ‘올바른’ 소통 경로와 방법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의사일수록 상세하게 질문하고 적극적으로 경청합니다. 어떤 명의라도 질문 없이는 처방이나 치료가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기업들이 각종 Data 분석을 통해 고객을 관찰하고 예측하려 애쓰고 있지만, 수집과 분석이 아무리 정교하다 해도 고객의 속마음까지 알아내기란 어렵습니다. 묻고 대답하며 상호 반응하는 과정을 통해 고객과 긍정적 소통 관계가 형성되면, Data와 Segment를 통해 추측만 하던 고객 개개인의 요구 사항과 취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고, 그렇게 파악된 정보들은 다시 상품과 서비스의 진화에 활용되어 본원적인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구매를 결정할 때 주위 사람의 추천이나 의견을 반영하는 고객의 비율은 약 35%이며, 아는 사람이 직접 추천하거나 소개하는 상품과 서비스는 믿고 구매할 수 있다는 고객은 90%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Word of Mouth’가 결정적인 구매 결정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 고객들이 어떤 기업의 상품과 서비스를 주위 사람들에게 '좋아서 스스로' 추천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런 고객들이 늘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기업의 실적과 미래는 보장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고객 관계 관리’의 궁극적 지향점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자, 이야기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결론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고객 관계 관리’, 즉 CRM은 IT 솔루션이나 고객만족 시스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 관계 관리를 위한 소통 경로와 소통 방법을 만들고 운영하는 전사적 차원의 대고객 활동을 의미하며, 궁극적인 지향점은 그 기업의 상품과 서비스를 자발적으로 추천해줄 수 있는 단골 고객과 우호 고객을 늘려가는 것입니다.

기업은 CRM을 통해 형성된 단골-우호 고객을 기반으로 기존 사업의 성과를 장기적으로 유지-강화할 수 있으며 확보된 고객 자산을 통해 새로운 영역의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CRM의 지난 25년간 흥망성쇠와 클라우드-디지털 환경에서의 생존과 부활 등을 돌아보고, 기업에서 실제 CRM은 어떻게 잘못 이해되고 오용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고객-소통-관계라는 본질적 차원에서의 CRM의 역할과 지향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해 보았는데요. 앞으로 더 다양한 소재와 관점으로 ‘고객 유지’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나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